최은영 작가의 경우는 섭외가 가장 오래 걸렸던 케이스였습니다. 그 섭외 과정 자체는 간명했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우선 기획 초기에 요조와 논의한 인터뷰이 조건 중 창작자가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들어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조의 아이덴티티를 ‘창작자’로 정의했고 ‘창작’이야말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작’과 ‘창작자’가 그 중요성에 비해 존중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시대가 오고 0 아니면 1이 전부인 디지털화가 모든 분야에서 격렬하게 진행되면서 정작 만드는 자보다 그것을 전달하는 자가 더 큰 힘을 가지는 세상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음악, 소설, 영화 등 단기간에 그 성공의 성패가 결정되는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여기에 더 큰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 압박이 정작 그 창작물에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공 신화와 흥행 공식이라는 경제 논리에 기초한 혁신가들이 창작자들의 주도권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습니다.
요조와 최은영 작가는 이런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직접 겪고 있는 당사자들입니다. 우리는 만드는 사람들만의 공감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뮤지션과 소설가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창작이라는 작업을 바라보는 시선과 창작물에 대한 존중 그리고 창작자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평소 요조는 소설가의 작업 방식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뮤지션의 작업이 그들이 바라본 세계를 음악을 통해 함축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소설가는 그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다시 건축하는 긴 여정의 창작 작업을 홀로 진행하기 때문에 그 외로움과 불안감을 깊이 공감하는 차원에서 나온 발언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요조와 최은영 작가는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인간 신수진과 인간 최은영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겸손함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나서야 할 때 분명히 나서는 강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요조의 페미니스트 선언이나 최은영 작가의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및 사과 요구는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의주의자들입니다. 회의주의는 비관에 기초한 염세주의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회의주의는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점진주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시대’의 세 가지 열쇠 중 ‘성찰’과 연결됩니다.
‘문학동네’를 통해 최은영 작가에 대한 섭외 메일을 보낸 후 기다림의 시간이 꽤 오래 진행되었습니다. ‘아! 거절인 건가’ 하는 생각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편집자의 핸드폰 번호를 구해서 직접 연락을 했고 당시 소설 ‘밝은 밤’의 최종 탈고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섭외가 작가에게 전달이 안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브매거진 창간호 작업을 하면서 ‘이 만남은 운명인가?’ 했던 장면들이 몇개 있었는데 이 장면 역시 거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인터뷰이 제안이 다시 전달이 되었고 최은영 작가 역시 요조에 대한 호감을 이야기하며 최종 승낙을 했습니다.
우리는 최은영 작가의 창작물과 그 작업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었고 요조는 중간중간에 최은영 작가의 작품 내용을 낭독하고 그 내용에 기반한 질문들을 이어가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리고 마치 대학교 때 스터디를 하듯이 최은영 작가의 모든 작품을 함께 탐독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과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0도 1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아날로그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최은영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 인터뷰가 최은영 작가의 창작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이 개인적 경험을 혼자 가지고 있지 않고 세상에 널리 공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